THEATER GROUP BEOKSUGOL
1981
벅수골은 창립 2개월만인 그 해 5월 23일 통영 봉래극장에서 박조열 작, 장현 연출의 <토끼와 포수>를 첫무대에 올렸다. 이 창립공연은 하루 4회 공연으로 각 회마다 객석3백석이 모두 차는 등 충무시민의 각별한 성원 속에 막을 내렸다. 당시 충무독서회 회원인 김홍종, 최정규, 서유승 등이 기획, 음향, 미술 등의 스텝으로 참여하였으며, 창단 직후 가세한 단원들도 창단 첫 공연에 참여하여 힘을 실었다.
창단 공연에 참여 했던 이들은 다음과 같다.
▶ 출연 : 김윤일, 김일선, 김정희, 장영석, 김철균, 허동진, 박연주, 유한혁
▶ 제작 : 기획:최정규, 무감:강지건, 미술:서유승, 조명:한동수, 음향:김홍종,
소품:이인종, 장치:지태호, 진행:강동조
한편 이러한 창립공연의 성황에 힘입어 같은 해 9월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간 하루 3회로 충무극장에서 이근삼 작, 장현 연출, 강지건 기획의 <이상무의 횡재>를 공연하였는데 실제적으로 제작비를 건지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전문성을 가진 스텝진이 많이 보강되어 극단의 내실을 탄탄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드라마센타에서 무대미술을 하던 정근대, 부산 극단현장에서 연기자로 활약하던 이교탁등 제씨들이 벅수골에 가세한 것이다. 장영석, 김일선, 김윤일, 허동진, 김정희, 박연주, 윤창현이 출연했으며, 스텝으로는 진행에 이인종, 조명 지태호, 효과 김홍종, 미술 서유승, 장치 최성남, 소품 강민, 분장 김혜명, 의상 이인선, 음악 윤용우, 무대감독 이교탁이 참여했다.
벅수골 창단과 함께 재건된 충무연극협회는 그간 지부장을 맡아오던 김우성이 예총 충무지부장으로 피선됨에 따라 강수성을 극협지부장에 추대하였다.
이후 장현은 '동랑 유치진선생추모연극제'를 기획하여 문예진흥원에 지원금을 요청해 지원금을 받게 되는데, 지원금 수령 단체가 통영예총이어서 한 때 불협화음이 일기도 했지만 이 추모 연극제를 극협, 문협, 사협, 미협, 음협 등 5개지부가 참여하는 종합예술제로 승화시키자는 결론을 내리고 타이틀을 '통영예술제'로 바꿔 같은 해 12월18일 봉래극장에서 '제1회 예술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현재 해마다 통영예총에서 개최하는 통영예술제는 1981년 12월 이러한 계기를 통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날 예술제에는 동랑의 자제이며 서울예술전문대학장인 유덕형씨 등 동랑의 유가족을 비롯한 향토문화인 및 여러 인사들이 참여하여 동랑 유치진을 추모했다.
한편 다음날인 12월19일부터 시작된 제2부 행사에서 시낭송, 기악연주, 무용 등 무대예술제가 열리고 이어 제3부에서 유치진 작, 장현 연출의 <토막>이 공연되었다. 장영석, 김은숙, 강 민, 허동진, 박연주, 김정희, 김호철, 이진미, 장 현, 송경필이 출연하고, 조연출에 이교탁, 무대감독 강지건, 무대미술 최성남, 무대장치 지태호, 조명 김윤일, 음악 윤용우, 분장 김일선, 소품 강동조, 진행에 이인종이 힘을 보탰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인 장현은 극단 창단 이전부터 성탄극, 전례극, 웅변 등 교회극 연출을 도맡아 오다시피 하였는데 81년 12월 24일 충무천주교회에서의 <최후의 심판> 역시 그가 희곡을 만들어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이 작품까지 창단 원년에만 4작품을 창작하는 열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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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82년의 공연상황을 살펴보면, 3월 26일 <은하수를 아시나요(칼버트링 작)>라는 작품을 부산동아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출신으로 81년 창단 직후 합류한 이교탁이 연출하여 동명예식장에서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2인극으로, 연출을 한 이교탁과 장영석이 출연하였으며, 강진건이 기획하고 장창석, 김정희, 박연주가 스텝으로 참여하였다.
6월10일에는 봉래극장에서 오태석 작, 장현 연출에 장영석. 김진국, 최태황, 이진미 등이 출연한 <환절기>가 공연되었는데, 기획에 강지건, 무대감독에 장창석이었다.
12월24일에는 성탄절 기념공연으로 윤대성작 <더러운 손>을 장현이 연출하여 충무천주교회에서 공연되었다.
이밖에도 극단 창단 이후 첫 번째 외부 초청 공연을 가졌는데, 12월23일과 24일 이틀간 경남대학 극예술연구회의 <결혼(윤대성 작, 성봉경 연출)>이라는 작품을 항남동 '결혼회관'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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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983년 1월, 충무연극협회는 강수성지부장의 임기 만료로 극단벅수골 장현 대표를 지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해에 정부가 지방문화예술할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극단만이 참가하는 전국지방연극경연을 실시하여 '제1회 전국지방연극제'는 부산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경남도의 대표 출품작을 선정하는 '제1회 경남연극제'가 같은 해 5월7일 진주학생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이 연극제에서 극단벅수골은 이강백 작, 장현 연출의 <알>을 가지고 참가,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고 이교탁이 연기상을 수상해 연극제 개최 첫해에 벅수골의 이름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이교탁, 장영석, 김일선, 하경철, 김진숙, 이진미가 출연하고, 강지건이 기획, 장창석이 무대감독을 맡았다.
경남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벅수골은 5월 20일 통영수산전문대학 강당에서 수상 기념 공연을 가졌으며, 이어 6월27일부터 7월8일까지 12일간 부산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지방연극제에 경남대표 극단으로 참가하여 열연을 하였으나 아깝게도 수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본선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서울 연우무대에서 활동하던 엄경환을 초대하여 작품의 질적인 면을 개선하고 출품하였는데 이 작품이 당시 정부가 지정한 금지작품이라 수상권에서는 제외 되는 웃지 못 할 시대적 아픔을 전국연극제 첫해부터 맛보아야 했다. 경남연극제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어쨌든 작품성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같은 해 9월21일 극단 사무실 1층 연습 공간 한 켠을 무대로 이강백 작, 최태황 연출로 <족보>의 워크숍 공연을 가졌는데, 이 작품을 연출한 최태황은 경남대학교극예술연구회 출신으로 통영 명정동에서 미술학원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이후 거제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 나면서 거제연극의 효시가 되었다.
1983년 11월 29,30일 이틀간 봉래극장에서 톰 존스 작, 엄경환 연출, 장현 기획으로 뮤지컬 <철부지들>을 공연하여 향토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이게 했다. 김진숙, 박연주, 김정희, 허동진, 김윤일, 장창석, 장영석, 하경철, 박승규가 출연하고, 스텝으로는 기획에 강지건, 무대감독 이교탁, 조명 지태호, 음악 윤용우, 미술 최성남, 장치 조재덕, 분장 김일선, 의상 오한영이었다.
당시 뮤지컬을 하기에는 기술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지만 연출가 엄경환의 지도와 배우들의 열정으로 무대화하여 처음으로 뮤지컬을 접한 시민들과 학생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연출가 엄경환은 83년 전국연극제 출품작 <알>에 협력 연출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계기로 이후 몇 번의 객원 연출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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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이듬해인 1984년 10월25일 항남동 결혼회관에서 오태석 작, 장현 연출, 장영석 기획으로 이상철 모노드라마 <약장수>를 공연하였는데, 구석봉이 고수로 참여하고, 장창석이 무대감독을 맡았다. 이 모노드라마는 당시 이상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상철은 서울의 극단76 단원으로 연극을 시작한 향인이었으나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84년 통영에 내려오면서부터 극단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어 이 작품은 공간사랑커피숍 개업 기념으로 초청받아 그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는데 부산 극단 현대극장에서 활동하다 귀향한 정태식이 개업 기념으로 초청한 것이었다. 공간사랑에서 공연한 <약장수> 공연에는 구석봉 대신 박승규가 고수로 출연했다. 이 시기부터 극단벅수골은 각 분야별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는 계기를 마련 기획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같은 해 11월10, 11일 이틀 동안에는 서울 76극단을 초청하여 유보상 작, 강영걸 연출의 박동과 모노드라마 <춤추는 허수아비>를 공연하였는데, 전문 극단을 초청하여 기획한 첫 번째 공연이었다.
그 후 11월30일, 제4회 통영예술제 참가작품으로 황석영 작, 엄경환 연출의 <장산곶매>를 봉래극장에서 공연하였는데, 당시 지역연극에서는 보기 드문 대작으로 많은 20여명이 출연한 마당극형식의 극이었는데 이러한 형식의 연극을 처음 접한 통영 관객들로부터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후 12월24일 이근삼 작, 이교탁 연출의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를 충무 천주교회의 성탄축하 학생극으로 공연하였는데, 극단 창립시부터 교획극을 중심으로 학생극 지도에 나서게 되는 것은 연극 후학 양성과 연극의 교육적 기능의 실천의지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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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1985년 1월28부터 30일까지 윤대성 작, 장현 연출, 장영석 기획, <너도먹고 물러나라>를 결혼회관에서 공연하였는데 당시 2.12, 12대 국회의원 선거시기와 맞물려 각 당 후보자의 현수막이 걸려있는 곳에 공연 현수막 '너도먹고 물러나라'가 나란히 붙어있어 행정관청에서 일방적으로 강제철거를 하였다. 이로 인해 공연을 준비 중이던 벅수골 단원들은 시청으로 몰려가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상철, 김정희가 출연하고 장영석, 하경철, 이교탁, 허동진, 지태호, 장창석, 박승규가 스텝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2월9일 재경충무학우회 주축으로 황석영 작, 장현 연출로 이농의 아픔과 도시근로자들의 애환을 다룬 <돼지꿈>을 통영극장에서 공연하여 방학 동안에 귀향한 대학생들이 향토연극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극단 단원인 박승규는 고교 동기생들이 추축이었던 이 공연에 찬조 출연하였다.
한편 경남연극제가 열린 4월4일 극단벅수골은 창작극 <해평들녘에 핀꽃>으로 참가했다. 이 작품은 이 고장의 전설 해평열녀 설화를 모티브로 한 죽음을 뛰어 넘는 애틋한 부부의 사랑이야기로 극단벅수골 대표 장현이 희곡을 쓰고 배우로 활약하던 이상철이 연출을 맡았으며, 작품에 삽입된 노래들은 음악가 윤용우가 직접 작곡하였다. 출연진으로 20여명이 캐스팅되어 마산완월강당에서 열린 연극제에 참가하여 개인상으로 이상철이 연기상을 수상했으나 단체 수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4월16일에는 장창석이 초청 기획한 서울 76극단의 <일어나라 알버트(바니 사이먼 작, 기국서 연출)>가 봉래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기주봉, 송승환의 열연으로 관객들에게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아역 배우로 출발해 브라운관을 통해 잘 알려진 송승환이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5월20일 장창석이 연출한 통영수산전문대학 극예술연구회의 창립기념공연 <호모세파라투스(이강백 작)>가 동교강당에서 공연되었다. 이 무렵부터 장창석은 점차 대학극과 청소년극 지도 연출을 맡으며 연출 수업을 해 나간다.
6월21,22일 이틀간, 향토연극인 고 설산 허창언 선생추모공연으로 박조열 작, 장현 연출의 <토끼와 포수>가 봉래극장에서 하루 2회씩 공연하였다. 이 공연은 극단벅수골이 후진양성이라는 목적으로 새로운 신인들을 대거 발굴해 선배연극인들이 스탭진으로 도와주는 좋은 선례를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85년 7월8일부터 9일까지 양일간 마산의 인형극단 초롱을 초청하여 박세일 연출의 <코끼리 코는 왜 길까요?>를 행복예식장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초청공연을 가졌다. TV에서만 보던 인형극을 현장감 있게 실제로 보고 같이 노래하는 등 교육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판단 아래, 11월11일 극단 초롱을 재차 초청하여 박세일 연출의 <춤추는 완두콩>을 공연하였다.
이어 극단벅수골은 12월17일부터 19일까지 행복예식장에서 이강백 작, 장현 연출의 <보석과 여인>을 장창석, 정태식, 김숙자 출연으로 공연하였다. 스텝으로는 기획 장현, 무감 장영석, 조명 김상영, 장치 지태호, 미술 서유승, 의상 김일선, 분장 박연주, 장치 박승규, 진행에 문인숙, 구석봉 등이 힘을 모았다.
벅수골은 같은 해 12월 28,9일 놀이패 ‘큰들’을 초청하여 충렬여자상업고등학교 체육관에서 <한솥밥먹기(정동주 작, 큰들 공동연출)>라는 마당극을 공연하였으며, 이 공연일과 똑같은 이틀 동안 불교학생회 주최로 여여원에서 공연된 <다시라기(허규 작)>라는 작품 역시 벅수골 장현 대표가 연출하고 단원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창단 후 5년 동안의 극단 활동은 갓 창단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부족한 경험은 외부 전문가를 불러 극복하려 했으며, 학생극, 교회극, 대학극 등의 지도를 통해 후학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연극전용극장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관이나 예식장을 빌리고 조명과 음향기기 등을 빌려 공연할 수밖에 없는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기획공연과 초청공연까지 한 것은 어쩌면 무모하기 까지 하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단 초기인 이 시기에는 타 장르 예술인들인 김홍종(음악), 서유승(미술), 최정규(문학), 윤용우(음악), 최성남(미술) 등이 스텝으로 참여하여 극단 활동에 협력하였고, 부산과 서울에서 연극 활동을 하던 이교탁, 이상철, 정태식 등이 가세하여 작품 창작에 힘을 보태 온 것이다.
또한 창립 멤버를 중심으로 새롭게 참가하는 단원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하나, 둘 연극 전업인들을 잉태하던 시기였다.
장현 대표 외 장창석이 83년부터, 박승규가 85년부터 극단에 상주하게 되며, 서울 76극단에서 활동하던 이상철은 84년 귀향하여 전업배우로 활동하게 된다.